김연실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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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연실은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배우로, 1927년 영화 《잘 있거라》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연극 배우와 대중가수로도 활동했으며, 1937년에는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로 꼽혔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만주국에서 활동하다가 광복 후에는 영화 《새로운 맹서》에 출연했다. 한국 전쟁 중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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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실 (배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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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연실 |
원어명 | 金蓮實 |
출생일 | 1911년 |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
사망일 | 1997년 8월 (87세)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종교 | 무종교 → 불교 |
가족 | 김연식(부), 김학근(오빠), 김학성(남동생) |
직업 | 영화배우, 연극배우, 가수 |
활동 기간 | 1927년 ~ 1949년 |
2. 생애
김연실은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경기도 수원에서 성장했다.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과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에 지방관을 지낸 김연식의 딸로서 경기도 수원군에서 태어나 수원 삼일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빠 김학근은 단성사 변사였고, 남동생 김학성은 유명한 영화 촬영기사가 되었다. 변사로 일하던 오빠의 소개로 나운규의 《잘 있거라》(1927)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토월회와 태양극단에서 활동하며 연극 무대에도 섰다. 1937년에는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로 꼽혔을 만큼 다작 배우였고, 능숙한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30년대 이후로는 대중가요 가수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1]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만주국 신징으로 건너가 스탠드바 등을 경영하며 생활하다가, 고협에서 연극 배우로 다시 활동했다. 1940년대에는 당시 유행하던 악극단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군정 시기인 1947년에는 신인 배우였던 최은희와 함께 영화 《새로운 맹서》에 출연했다. 김연실은 최은희를 마음에 들어하여, 자신이 배우로 일하면서 뒷바라지한 동생 김학성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성사시켰다.[2] 1949년에 이규환이 감독한 《돌아온 어머니》가 마지막 출연작이다.
한국 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으며, 좌익 언론인이었던 연인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냉전 시기에는 김연실이 숙청되어 협동농장에서 고생하면서 월북을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반공주의 시각의 목격담이 대한민국에서 널리 퍼진 적도 있었으나, 2002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것이 확인되었다.[3]
2. 1. 초기 생애 및 활동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경기도 수원에서 성장하였고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는 기록과,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에 지방관을 지낸 김연식의 딸로서 경기도 수원군에서 태어나 수원 삼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빠 김학근은 단성사 변사였고, 남동생 김학성은 후에 유명한 영화 촬영기사가 되었다.[1]변사로 일하던 오빠의 소개로 나운규의 《잘 있거라》(1927)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토월회와 태양극단에서 활동하며 연극 무대에도 섰으며, 1937년에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로 꼽혔을 만큼 다작 배우였다. 능숙한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연기 평이 남아 있다.[1] 1930년대 이후로는 대중가요 가수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2. 2. 영화계 입문 및 연극 활동
나운규의 《잘 있거라》(1927)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1] 토월회와 태양극단에서 활동하며 연극 무대에도 섰다. 1937년에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로 꼽혔을 만큼 다작 배우였으며, 능숙한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연기 평이 남아 있다.[1]2. 3. 가수 활동
1930년대 이후로는 대중가요 가수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1]2. 4. 일제 강점기 말기 및 광복 이후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만주국 신징으로 건너가 스탠드바 등을 경영하며 살다가, 다시 고협에서 연극 배우로 활동을 재개했다.[1] 1940년대에는 당시 유행하던 악극단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미군정 시기인 1947년에 당시 신인 배우였던 최은희와 함께 영화 《새로운 맹서》에 출연하였다. 김연실은 최은희를 마음에 들어하여, 자신이 배우로 일하면서 뒷바라지를 한 동생 김학성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성사시켰다.[2] 마지막 출연작은 1949년 작품인 이규환의 《돌아온 어머니》이다.
서울에서 다방을 운영하다가 한국 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좌익 언론인이었던 연인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냉전 시기에는 김연실이 숙청되어 협동농장에서 고생하면서 월북을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반공주의 시각의 목격담이 대한민국에서 널리 퍼진 적도 있었으나, 2002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것이 확인되었다.[3]
2. 5. 월북 및 이후 행적
한국 전쟁 중 서울에서 다방을 운영하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좌익 언론인이었던 연인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냉전 시기에는 김연실이 숙청되어 협동농장에서 고생하면서 월북을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반공주의 시각의 목격담이 대한민국에서 널리 퍼진 적도 있었으나, 2002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것이 확인되었다.[3]참조
[1]
서적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12-15
[2]
저널
"
[3]
뉴스
북한영화계 인민.공훈배우 50명선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연합뉴스 인용)
200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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